일각에서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 재산을 기부하게 되었다고도 설명한다. 1888년에 루드비그 노벨이 사망하자, 그를 더 유명한 형제와 혼동한 프랑스의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표제 하에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인물”이라고 폄하하는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알프레드 노벨이 속죄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인데, 그럴듯한 주장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확증까지는 없다. 애초부터 노벨 가문은 오랫동안 수뢰나 폭탄 등의 군수품을 제조하여 부를 축적한 이력이 있었으니, 알프레드 역시 다이너마이트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어쩌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해되거나 오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역시 도구에 불과하다고, 따라서 거기다가 선악의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가 애초에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게 된 것도 보다 안전한 취급을 위해서였음을 고려하면, 그 결과물인 다이너마이트로 인한 악명은 적잖은 아이러니다.
1896년에 노벨은 협심증 진단을 받았는데, 묘하게도 그 치료제는 혈관 확장 효과를 지닌 나이트로글리세린 성분 약품이었다. 그해 12월 10일 새벽 2시, 그는 63세로 산레모의 자택에서 사망했고, 29일에 스톡홀름으로 옮겨져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며칠 뒤인 1897년 1월 2일에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고, 이를 토대로 노벨 재단이 수립되어 1901년 12월 10일에 노벨상의 첫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노벨상의 기원에 관하여
 알프레드 노벨은 1893년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을 말입니다.”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의 제정에 관해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해 3월 14일, 그는 최초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산 가운데 20퍼센트는 일가친척에게 나누어주고, 또 17퍼센트는 병원과 의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에 나누어 기부하고 기금을 조성해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발명”에 상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의 37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이렇게 처분하도록 지시했다. “모두 기금을 만들도록 스톡홀름 학술원에 기증할 생각이다. 학술원이 매년 이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생리학과 의학을 제외한 학문과 진보의 전 분야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정신적인 작업에 대한 포상으로 나누어주게 할 계획이다. (...) 이 유언장에 예고된 모든 상들이 스웨덴인이건 외국인이건, 또 남자이건 여자이건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가장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 나의 확고한 소원이다.” 1895년 11월 27일에 노벨은 유언장을 약간 수정했고, 이것이 그의 사후에 공개되어 오늘날 노벨상의 기본 취지를 표현한 문서로 공인되었다.
오늘날은 세계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인 노벨상이지만,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된 직후에만 해도 스웨덴 내부에서는 이 상의 제정을 놓고 격렬한 비난이 일어났다. 노벨의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한때 애인이었던 소피까지도 자신들의 정당한 유산을 엉뚱한 상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법적 대응을 고려했다. 수상자 선정에서 국적이나 성별에 구애되지 말라는 유언의 당부 때문에 스웨덴 국민 사이에서는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키는 몰지각한 처사라는 비난도 나왔다.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하게 한 것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그 당시에만 해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국가였기 때문에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을 겸했으며, 1905년에 이르러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논란의 와중에 설립된 노벨 재단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실현하는 데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총 3천 3백만 크로나(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다)로 집계된 노벨의 유산 가운데 세금을 제외하자 3천 1백만 크로나가 남았다. 이 가운데 2천 8백만 크로나가 노벨상 기금이 되었고, 나머지는 운영 기금이 되었다. 재단은 노벨의 유언 중에서도 비현실적인 부분(가령 과학상 후보를 “지난해의 발견•발명”만으로 제한한 것)은 보다 유연하게 적용하기로 했고, 전반적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라는 취지에 근거해 수상자를 결정하기로 결했다. 1900년 7월 29일, 노벨 재단은 스웨덴 정부의 공인을 받았다.
노벨은 과학자였으니 과학 분야 상들의 제정은 당연해 보이지만, 문학상과 평화상은 어딘가 의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분야 역시 그의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노벨은 평생 문학을 가까이 하며 시와 소설을 습작했고, 당대의 여러 평화운동가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나는 전쟁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대규모의 파괴력을 가진 물질이나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벨의 이러한 제안은 어쩌면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자칫 무제한적인 군비 경쟁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최근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1969년에 스웨덴 제국은행이 노벨 재단과는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과학상’을 제정함으로써, 오늘날 ‘노벨 경제학상’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분야가 생겨났다. 한편 미국의 공학자인 헨리 페트로스키는 명색이 화학공학자였던 노벨이 제정한 상에서 줄곧 공학자들이 배제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는 노벨의 유언을 그 집행자들이 편협하게 해석한 결과라고 일리 있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즉 ‘과학’에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이 모두 포함되는데도, 노벨 재단 측에서 순수과학 분야만을 대상으로 시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노벨상의 과학 분야에서 공학자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단 두 차례뿐이었으며, 가장 최근의 사례는 무려 100년 전인 1914년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벨 수학상이 없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한 가지 묘한 소문이 오래 전부터 떠돌고 있다. 즉 노벨의 부인이 어느 수학자와 불륜 관계였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품은 노벨이 수학 부문의 상을 만들지 말도록 유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벨이 평생 독신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이는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 또한 노벨의 연적이라면 훗날 소피의 남편이 된 어느 군인뿐인데, 이는 차라리 평화상의 제정 근거라면 모를까 수학상과는 무관해 보인다. 따라서 그보다는 노벨이 구체적으로 지정한 분야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 관심사를 반영했음을 근거로 삼아, 수학은 아쉽게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본문에 인용된 노벨의 말은 다음 책에서 가져왔다. [노벨](프리츠 푀트클레 지음, 한길사, 2000) |